? 찾아가는 길
신돌석장군의 생가는 영덕게로 유명한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찾아가는 길이 두 갈래이다. 하나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인터체인지를 내린 뒤, 34번 국도를 따라 안동과 진보를 거쳐 황장재 고개를 넘어 영덕으로 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포항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영덕을 지나 울진방면으로 14㎞ 정도 가다가 축산면 도곡에서 우측으로 2㎞정도 들어가면 장군의 생가가 보인다. 국도변에는 최근 조성한 장군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어느 길로 가나 지나는 길목에는 많은 볼거리가 산재해 있어 지겨운 줄 모르는 학습여행길이 될 것이다.
? 생가의 모습
장군의 생가는 마을을 들어서면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넓은 대지에 소담한 4칸잡이 초가집이 돌담장으로 둘러 쌓여 있다. 들어서면 왼쪽에 판장문을 단 부엌이 있고, 부엌에 붙여 안방과 대청, 건너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에는 장군이 받은 건국공로훈장이 걸려있어 다시 한번 장군의 애국충정을 느끼게 한다. 도둑당할 위험이 있어서인지 많은 살림살이는 전시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마당에는 장군의 업적을 새겨놓은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부엌 옆쪽에는 따가운 햇살을 받고 장독대가 준비되어 있다. 마당에서 집 뒤를 보면 나지막한 동산에 잡목 숲이 우거져 있고 아래를 내려오면 장군의 생전 기개를 말해주듯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생가가 정비되기까지는 많은 수난이 있었다. 1940년에는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위해 일본 관헌들이 초가집 생가에 불을 질러 지붕 일부가 소실되었다. 장군을 따르던 주민들이 1942년에 지붕을 보수하여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1995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태백산호랑이로 불리었던 장군의 살아생전의 항일활동에 비하면 생가의 모습은 된장국을 연상하리만큼 토속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 안에 서면 장군의 생장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생가를 보고 마을을 빠져나오다 보면 몇 거루 잡목사이에 허물어져 가는 집하나를 볼 수 있다. 주변 잡목에 금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봐서 금방 마을제사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생가가 있는 도곡리에서는 오래 전부터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국도 변에서 울진을 향해 300m 정도 가다보면 장군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막 공사가 끝나서인지 고색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고래등같은 기와집 여러 채가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는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장군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전시관 등이 있고, 넓은 주차공간과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방문객이 편안히 쉬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 인물소개
구한말의 평민신분으로 의병활동을 한 신돌석 장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경상북도 영해에서 대구까지 한달음에 오고간 신출귀몰한 축지법, 전신주를 뽑아 일본군을 쳐죽인 무용담, 나이 삼십에 부하의 배신으로 아깝게 죽어간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의 짧은 생애는 전설적인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죽은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역사적 기록자료 보다는 홍길동 같은 일화들로 우리들의 머리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는 “평민출신 신돌석은 평해, 울진, 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 평민출신인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병운동이 신분을 초월한 국권수호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역사를 통틀어 신돌석 장군 같은 평민출신, 아니 천민출신 의인은 그리 흔치 않다. 거기다가 선비와 유생, 주사 등 이른바 양반계급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을 부하로 거느리며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실존 인물은 신돌석 장군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신돌석 장군의 실제 이름은 신태호이다. 돌석은 어릴 적 이름이다. 장군은 1878년 11월 외가인 축산면 도곡 2동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날랜 행동과 담력으로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모든이들에게 숭앙의 대상이 되어 온 인물이다. 본래는 이름 있는 평산 신씨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배척을 받아 오다가 장군의 7대조 때 동해안의 영해로 낙향하여 평민으로 전전하면서 살아왔다. 그가 성장한 시대는 조선시대 봉건사회가 붕괴하던 때였다. 1871년 봉건체제를 반대하여 영해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불지른 이필제의 난을 지켜 본 장군 역시 이런 기질을 받고 자란 것으로 평가된다.
장군은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나, 골목에서나 대장노릇을 하였다. 뛰어난 힘과 날렵한 몸짓으로 하루에 500리를 달려, 이를 본 고장사람들은 장사가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성장기에 체력의 기본을 갖추었다. 서당에서 익힌 학문을 바탕으로 15세 무렵에 병서를 통해 무술을 익힌 장군은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참을 수 없는 적개심에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동안 사귀어 온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킬 결심하게 된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에서 3백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적과 싸움을 시작한다. 1906년에는 영해에서 3천명의 대규모 의병을 편성하여 태백산맥 일대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여 적을 공포의 분위기에 몰아넣었다. 1907년 12월 서울공격을 목적으로 전국의 의병을 양주에 집결시키는 계획에 신돌석 장군은 평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장군의 통솔력과 힘에 놀란 일본군은 현상금까지 걸며 장군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 김자성이 일본군에게 매수되면서 장군의 짧은 일생은 막을 내리게 된다. 장군에게 독한 술을 먹게 한 김자성 형제는 술 취한 장군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낙목에 가로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1905년 장군의 나이 27세에 평해 월송정에 올라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근심하며 지은 장군의 시조이다. 이기와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내 한 몸도 가눌 줄 모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가슴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으로 짧은 일생을 마친 장군의 애국충절을 불어넣고 싶은 심정이 들뿐이다.
? 주변의 볼거리와 먹거리
생가를 지척에 두고 많은 명소와 먹거리가 있다. 우선 강구항이 최대의 볼거리이다. 영덕대게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아늑한 포구를 끼고 해산물을 요리하는 집이 많다. 또 드라이브코스로 이름난 강구-축산간 해안도로와 괴시리전통마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대소산 봉수대, 여름철에 가 볼만한 곳인 대진해수욕장, 경보화석박물관, 해맞이공원 등, 동해안을 끼고 수많은 볼거리가 펼쳐진다.
영덕하면 대게를 떠올리지만 먹는 법을 잘 모른다. 대게 판매점에 게를 주문해 놓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대게 먹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다리만 먹고 게장이 든 아까운 몸통은 못 먹는 것인 줄 알고 그대로 놓고가는 경우도 있다. 게는 껍질만 빼고 모두 먹을 수 있다. 다리살은 맨 끝마디를 부러뜨려서 당기면 살 전체가 통째로 빠져나온다. 또 대게 끝 부분을 부러뜨린 후 다리껍질을 길쭉하게 가위질 한 후 파내 먹는다. 몸통은 뚜껑을 연 후 연한 겉껍질을 하나 하나 벗기면 맛있는 몸통 살이 드러난다. 게장은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려 뜨끈뜨끈한 공깃밥과 비벼먹으면 대게의 참 맛을 모두 맛보게 된다.
대게 갑(뚜껑)은 게장에다 따뜻한 밥과 김, 파, 참기름, 김치등으로 게장과 비벼 먹으면 그 또한 별미가 아닐 수 없다. 대게는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골라야 한다.
1. 배 부분이 검거나 검은색이 도는 것은 피한다.
2. 다리가 몸에 비해 가늘고 길어야 한다.
3. 배 부분을 눌러 말랑말랑한 것은 피한다.
4. 들어봐서 다리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고른다. 특히 집게다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싱싱하다. 반대로 다리가 처져 있으면 좋지 않다.
5. 다리가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것을 고른다. 허연 빛깔의 대게는 피한다.
6. 게 뚜껑에 검은 게딱지가 붙은 것이 좋다. 검은 게딱지는 공생관계에 있는 일종의 기생충으로 게딱지가 붙은 대게는 게딱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맛이 좋다.
7. 찐 대게의 경우 크기가 같더라도 무거운 것을 고른다.
영덕휴게소 맞은편에 동해별미식당은 생대구탕으로 유명하다. 동해연안 청정해역에서 잡히는 싱싱한 대구만을 사용하여 맛이 담백하고 시원함이 어떤음식과도 비교될 수 없으며 피를 맑게하고 동맥경화를 예방할 수 있는 식품으로 술드신 다음날이나 40대이후 장, 노인층에 아주 좋은 건강식단이다. 새우, 다시마를 끓인 국물에 버섯(3가지이상)을 넣고 무를 어슷썰어 넣은 후 대구살을 넣어 끓기 시작하면 두부와 갖은 양념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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